“안 울 거야.”
학교 가는 차 안에서 아이가 불쑥 말했다. 우연히 켜 둔 라디오에서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Can’t stop the feeling’이 흐르고 연달아 마룬 5의 ‘memories’까지 나오면서 내가 노래를 소재 삼아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하던 차였다.
“‘Can’t stop the feeling’은 독일 와서 1학년 때 처음 배웠던 곡이잖아. 우리 임시로 살던 집에서 네가 침대 위에서 춤추면서 노래하던 거 기억나?” “와, 이번엔 ‘memories’네. 가사 봐봐. ‘memories bring back, memories bring back’. 네가 학교에서 쌓은 모든 기억들이 우리를 항상 베를린에 데려다 줄 거야. 근데 오늘 학교 가는 마지막 날인 거 라디오에서 어떻게 알고 이런 노래들을 틀어주는 거지? 너무 신기하다.”
실은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아서 일부러 더 농담을 했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데려오느라 3년을 거의 매일같이 오가던 길이었으니 왜 섭섭하지 않을까.
기대에 불과했다.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서 아이는 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하지 못하고 지나가버린 이번 학기에 대해, 친구들과 더 많은 추억을 쌓지 못한 것에 대해, 심지어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작별해야 하는 친구들에 대해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그래도 잘 견디는가 싶더니, 마지막 등교 전날, 잠자리에서 들면서부터 아이는 훌쩍거렸다. 드디어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눈물 보이지 말고 멋지게 인사하고 돌아오라고 말했다. “네가 친구들 생각하면서 만든 굿바이 송을 생각해봐. ‘hopes and dreams’잖아. 다시 만날 희망을 갖고 있으면 꿈이 이뤄질 거야.”
말없이 숨죽여 울다가 잠든 아이를 보면서 나는 한국에서 독일에 오던 날을 떠올렸다. 친구들과 헤어질 때도 예상과 달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아이는 공항으로 출발하기 직전, 아이를 안고 아쉬워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보고 참았던 눈물을 한 번에 쏟아냈다. 이렇게 3년이 빨리 흐를 줄을 모르고 그때는 나도 가족들과의 잠깐 이별이 얼마나 아팠던지. 그래도 거기까지였다. 지난해 말, 나는 아이에게 한국에서 독일에 올 때는 왜 많이 슬퍼하지 않았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는 말했다. “그때는 3년만 지나면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고 생각했으니까 참을 수 있었어. 그런데 독일에는 다시 올 수가 없잖아. 그래서 훨씬 더 슬픈 거야.” 언제든 여행을 올 수 있다고 했지만 별반 큰 위로가 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위로하자고 한 말이었다. 실은 나도 베를린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설령 온다고 해도 삶의 터전이 되어주었던 3년간의 그것과는 너무 다른 것일 테니 고백하건대 스스로에게도 그다지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아이에게 내색할 수 없어 괜찮은 척하며 지낼 뿐, 나 역시 한국에 돌아갈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감정적으로 힘들 때가 많다. 어느 날은 충분히 행복했다고, 한국에서의 삶도 기대가 된다고 의지를 다졌다가 또 어떤 날은 이곳에서 맺은 모든 인연들과 하다 못해 애정 하는 공간들, 잊지 못할 풍경들까지 생각이 나 끝도 없이 가라앉는다. 실은 귀국 준비를 하느라 바쁘단 핑계로 혹은 크고 작은 스트레스로 애써 이별의 감정을 잊으려 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일상 중의 하나로 지나가고 싶었다. 그런 나를 무너지게 한 건 독일인 친구의 이메일 한 통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내가 떠나는 것에 대해 본인이 느끼는 감정들을 길고 긴 이메일에 꾹꾹 눌러 담아 보내왔다. 바쁜 귀국 준비를 핑계로 그녀의 만남 요청에 잘 응하지 않는 나에 대한 서운함과 함께. 그녀는 말했다. 일상을 지키며 사는 것도 좋지만, 남은 기간만큼은 소중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면서 마무리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우리에겐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고. 그랬다. 나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고, 더 큰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막상 깨닫고 보니 거리에서 마주치는 풍경 하나도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았다. 변덕스러운 독일의 여름 날씨도 소중하게만 느껴졌고, 매일 아침 독일어를 못하는 내게 끊임없이 독일어로 말을 걸어주는 이웃 할아버지도 벌써부터 그립게 느껴졌다. 매일 이별을 의식하고 산다는 건 한 편으론 힘들었지만 한 편으론 매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감정이랄까.
아이 역시 그렇게 지나가길 바랐다. 다행히, 마지막 날 학교가 끝난 후 만난 아이는 생각보다 밝은 모습으로 ‘울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생님들과 작별의 순간들을 이야기해줄 땐 살짝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이별의 순간들을 잘 극복해내고 있었다.
<오늘의 깨달음>
이별을 통해 우리는 오늘도 성장하고 있는 중.
- 작가: 어나더씽킹 in Berlin/공중파 방송작가,종합매거진 피처 에디터, 경제매거진 기자, PR에이전시 콘텐츠 디렉터, 칼럼니스트, 자유기고가, 유럽통신원 활동 중, ‘운동화에 담긴 뉴발란스 이야기’ 저자
현재 베를린에 거주. 독일의 교육 방식을 접목해 초등생 남아를 키우며 아이의 행복한 미래에 대해 고민합니다.
- 본 글은 어나더씽킹 in Berlin 작가님께서 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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