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아이들은 말을 잘 못했지만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이렇게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옷들이 한 무더기 쌓여있는데 이걸 왜 재미없게 개어 없애? 신나게 갖고 놀아야지!”
그 넘치는 매력으로 아이들은 가끔 길바닥에서 아이스 스케이팅의 한 장면을 선보이기도 한다. 특히 장난감 매장에서 우리는 이런 예술적 포즈의 페어를 많이 만날 수 있다.
이 쪽으로 가야 한다니까! 싫어.
운이 좋으면 이런 아방가르드한 행위예술도 목격할 수 있다.
학교 가는 길에 군것질하지 말라는 엄마 말씀에 나는 하굣길에만 떡볶이를 입에 물었다. 흐흐.
내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은 어여쁜 너
아직 일곱 살이라는 마의 벽에 도달하지 못한 나로서는 내가 목격한 미운 세 살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아이들은 둘 다 뭐 이런 애들이 있나 싶게 고분고분하고 순했지만, 두 살 무렵이 되면서 슬슬 새로운 자아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나이로는 세 살. 우리나라에 ‘미운 세 살’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미국에는 ‘terrible twos’라는 표현이 있다. 뱃속에서부터 한 살 먹는 계산법은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새해가 되면 전 국민이 한 살씩 더 먹는 이 계산법은 대체 언제 어디서 온 건지 몹시 궁금하다.)
그리고 차츰 공공장소에서 당황스러운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네, 아래 사진은 소아과 플레이룸에서 기다리는 저의 자식 놈의 모습입니다.)
No라는 단어는 왜 그리 발음하기 쉽게 짧고도 강렬한 것인가.
꼭 그렇게 앉아있어야겠니
엄마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고분고분 따라오는 아이가 예쁠 것 같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싫어!”를 모르는 인간은 노예와 같다. 아이는 지금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몹시 귀여운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의 “싫어!”는 찬란한 자유 의지의 선언이다. 한숨이 아니라 기쁜 미소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은 한다. 흠흠.)
산책하다 마음이 바뀌었다. 싫어, 안 갈 거야. (그 와중에 조그맣게 쪼그려 앉은 고집스러운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사진이나 찍고 있었다.)
아이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자기 인생을 살 준비를 꼬물꼬물 하는 중이다.
대견한 세 살, 눈부신 세 살인 것이다.
아이들은 혼낼 게 아니라 가르쳐야 할 상대다
훈육이라는 것은 ‘혼낸다’와 동일한 말이 아니다. 가르칠 훈(訓), 기를 육(育). 즉 가르쳐서 기르는 일이 훈육이다. 훈육이라는 말 뜻대로 부모는 뭔가를 가르치고 아이는 뭔가를 배우려면, 아이 스스로 이 상황이 편안하다고 느껴야 한다. 조금이라도 강압적이어서는 배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혼낸다는 생각부터 버리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한다. 언젠가 무한도전에 오은영 선생님이 나오셨을 때, “애를 어떻게 혼내야 돼요?” 하는 쌍둥이 아빠 정형돈 씨의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아이를 왜 혼내나요? 아이들은 혼내는 게 아니라 가르쳐야 할 상대입니다.” 먹던 과자를 뱉고 경건하게 절이라도 올려야 할 것 같은 진리의 말씀. 이것만 마음에 넣어 두어도 절반은 성공할 것 같다.화는 나쁜 게 아니다
그 조그맣고 귀여운 아이도 인간인 이상 화나는 일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그런데 아이가 내는 화를 부모가 무조건 꾹꾹 누른다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자기감정을 감추거나 외면하여 결국 화병 꿈나무로 크거나, 평소에는 고분고분하지만 안에 폭탄을 하나 품고 있거나, 시련이 닥쳤을 때 어쩔 줄 몰라하며 엄마 아빠만 찾는 아이가 되거나.
화를 ‘잘’ 낸다는 건 어른에게도 힘든 일이다. 사실 내 경우에도 화를 제대로 잘 내 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우리 엄마는 화가 나도 잘 참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나는 화를 잘 참는 어른이 되었지만 화를 잘 내는 것에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그 결과 나는 폭탄으로 자랐다(어감이 좋지 않군요. 흠흠.). 평소에는 부드럽고 안온한 편이지만 한 번 화를 낼 때는 불타는 개지랄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세상이 늘 네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화를 낼 기회를 준다고 물건을 때려 부수거나 동생에게 이단옆차기를 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너의 감정은 중요하지만 세상에는 용납되는 행위와 그렇지 않은 행위가 있고, 너의 자유가 아름다우려면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자유의지가 싹트고 있는 아이들에게 자유와 방종의 차이점을 가르쳐 주는 것이 부모의 몫이다. 우리는 친절하게 단호할 수 있다.
부모의 품 안에서 좌절과 시련을 겪는 법을 배우고 잘 넘어져 봐야 세상에 나가 넘어졌을 때 덜 울고 툭툭 털고 일어나는 사람이 될 터.
대체 이 꼬맹이들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 걸까?
그러다 이 불타는 개지랄 기술 보유자 (무형문화재. 대체로 3-4년에 한 번씩 시연된다.) 엄마에게 한 줄기 빛이 떠올랐으니 그게 바로 공리주의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다.
아이이니만큼 그 대상을 ‘자기 자신(즉 아이)과 타인’으로 한 단계 확장해서 적용시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아이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 타인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일.
- 아이가 화를 내며 방으로 달려가 문을 닫는 건 괜찮지만 화가 난다고 다른 사람을 때리는 건 안 된다. 그건 타인을 해(harm)하는 일이기 때문에.
- 엘리베이터 비상벨을 누르고 싶은 아이의 마음은 허용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말고 엄청나게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비상구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아이의 고집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기 때문에 허용해 줄 수 있다. 다만 친구가 놀러 오기로 되어 있다면, 그 친구가 해(harm)를 입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런 날은 안 되겠다.
- 어마어마하게 비싼 장난감을 사는 건? 부모에게 막대한 금전적 손실(harm)을 입히는 일이다. 후후. 엄마 아빠가 너에게 선물하고 싶은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그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 엄마가 권하는, T.P.O.에도 맞는 예쁜 새 옷을 맹렬히 거부하며 거적때기 같은 옷을 입고 싶어 하고, 햇살에 눈이 멀 것 같은 날에 굳이 장화를 신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도 이 규칙에 따르면 오케이다. 별다른 해(harm)가 없는 일들이다.
물론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신통한 규칙은 아니다.
1) 해가 됨의 판단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이를테면 아이가 집을 어지를 자유는 그걸 치워야 하는 부모에게 해가 되는 것일까?)
2) 자유와 예절은 또 다른 문제이며 (문을 닫는 건 괜찮지만 쾅 닫는 건? 딱히 해가 되는 일은 아니지만 안 그러면 좋겠지.)
3) 당장의 신체적 위해가 아닌 미래의 잠재적 해를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주로 TV나 유튜브 시청이 그렇다).
그래서 가정마다 나름의 세부적 규칙은 다시 만들어야 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no harm principle은 기본이 되는 규칙으로서는 꽤 쓸만한 규칙이었다.
아이들은 우리를 따라 하고, 우리를 믿는다.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본을 보이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아직 사춘기가 오려면 멀었지만(그 세계는 너무나 미지의 영역이라 이제부터 각오와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나의 규칙이 이렇게 간소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이가 말을 안 들을 때는 이런 두 가지 규칙으로 통과해 보려고 한다.
1) no harm principle
2) know thyself
그런데 생각해 보니 늘 좋은 게 좋은 건 아니지 않나. 싫은 건 싫은 거지.
싫은 게 좋아질 수도 있고, 또 좋은 게 싫어질 수도 있고. 그게 인생이지.
서로가 가진 가시만큼의 공간을 인정해주면서.
누가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했나 고슴도치 새끼는 원래 예쁘다
아이는 말을 안 들으면서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성장시키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
부모는 아이와의 갈등과 민낯 보기의 무수한 경험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된다.
-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정치철학 박사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 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 응원의 메세지나 문의를 아래 댓글창에 남겨주세요. 댓글을 남겨주시면 작가님께 메세지가 직접 전달이 됩니다.
ⓒ 구텐탁코리아(//www.gyrocarpu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