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3학년이 된 지 한 달 보름이 지난해 10월 중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알림’ 이메일 하나가 날아왔다. 3~5학년 대상으로 스튜던트 카운실(student council) 선거가 곧 실시되니 관심이 있는 아이는 스피치를 준비해달라는 내용. 덧붙이기를, 스튜던트 카운실 후보의 자격으로는 책임감이 있고 아이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으며 학교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마인드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돼 있었다. 3학년부터 반장을 뽑는다는 얘기를 들어 알고는 있었는데 한 달이 훌쩍 넘어가도록 별 이야기가 없어 그런가 보다, 하던 차였다.
물어보나 마나 아이는 당연히 반장 선거에 나가고 싶어 했다. 동네 사는,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한 친구가 반장이 됐다는 얘기를 듣고 줄곧 아이는 이제나저제나 반장 선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한 해 전, 반장 선거에 나갔다가 떨어진 아이를 두고 어떤 엄마가 “우리 아이가 그렇게 권력욕이 있는 줄 몰랐다”며 “내년에는 기필코 반장이 되고 말겠다고 벌써부터 벼르고 있다”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우리 아이도 권력욕이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한국에선 남들 앞에 나서기를 부끄러워했던 아이가 독일에 온 후, 그게 무엇이든, 일단 해보려고 하는 그 마음이 기특해서 당연히 적극 응원해주기로 결정.
난생처음으로 해보는 스피치를 준비하면서 아이는 꽤 공을 들였다. 아이가 물어보는 것엔 대답해줄 수 있지만 스피치를 준비하는 과정은 오롯이 아이에게 맡기는 게 맞다고 판단한 우리 부부는 우왕좌왕하는 아이를 지켜보며 그 자체로 좋은 경험이 될 것이란 확신을 하게 됐다. 먼저 반장이 된 친구의 경험담을 듣기도 하고 우리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며 아이는 결국 스스로 짧은 스피치 원고를 완성했다. 나의 주문은 딱 하나 ‘무조건 유머러스하게 할 것’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겪은 몇 번의 큰 프레젠테이션 성공담을 들려주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 번만 크게 웃어도 거의 성공한 것”이라는 말도 해주었다. 아빠는 큰 목소리와 자신감 있는 태도, 적절한 손짓 등 액션을 섞을 것, 그리고 정확한 발음을 주문했다.
다음 날, 아이는 학교에 가는 차 안에서도 스피치를 연습하며 반장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나는 슬 걱정이 됐다. 저러다 떨어지면 얼마나 실망할까, 싶어서였다. 당선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극구 강조하며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그날 아이를 데리러 가는 시간까지 나는 왜 긴장하고 있었던 것인지.
하교 시간, 운동장에서 아이를 기다리는데 계단을 내려오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웃으면서 반짝, 하는 눈빛. 나는 아이의 표정에서 ‘당선’을 읽었다. 담임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He made it!”
집에 오는 내내 아이는 흥분 상태로 각 아이들마다 스피치가 어땠는지 자신의 스피치 때 반응은 어땠는지, 당선됐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등등을 폭풍처럼 쏟아냈다. 남녀 각 1명씩 뽑는데 후보로는 남녀 각각 5명씩 출마했고, 어떤 아이는 아예 스피치를 외우지 않아서 종이를 보고 읽기도 했으며, 너무 긴장한 나머지 한 친구는 스피치가 끝나자마자 울어버렸다고. 그 와중에 자신은 스피치를 하다가 당선 예감이 들었다는 말도 했다. 아이가 유머 포인트라고 생각하고 넣은 바로 그 문장과 손짓에서 아이들이 ‘빵’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아이가 반장이 됐다는 결과물 자체도 기뻤지만,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아이가 얼마나 성장했을지를 생각하니 더없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반장은 무슨 일을 하는 거니?” 아이는 모른다고 했다. 한국처럼 학급회의 같은 걸 주도하나? 때로 선생님을 돕는 역할도 하면서? 그때까지 반장 롤에 대한 어떤 사전 정보도 없어 궁금해하는 나에게 아이는 말했다. “다음 주부터 스튜던트 카운실 회의가 일주일에 두 번씩 있다고 하니까 가보면 알겠지.” 일주일에 두 번이나? 한 달에 두 번이 아니고? 한국으로 치면 반장단 모임 그런 건데, 왜 일주일에 두 번이나?
결과적으로 아이는 ‘반장’이 된 게 아니었다. 어떤 한국인 학부모가 “왜 한국 엄마들은 다 반장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한국에서와 같은 반장 개념이 아니”라고 불평 섞인 발언을 했던 것처럼. ‘반장’이라고 임의적으로 해석해버린 ‘스튜던트 카운실’은 그 사전적 의미 그대로 ‘학생자치위원회’였고, 아이는 그 위원회의 학급 대표로 선출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리더의 개념은 있되 한국의 ‘반장’이라는 직책이 갖는 아주 사소한 권한 같은 것조차 없는 학교를 위해 오로지 ‘봉사’하고 ‘노력’하는 자리였다.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는 전제 하에) 국회 같은 개념에 가깝다고 할까. 아이들을 대표하는 각 반 두 명을 선거를 통해 뽑고, 그들이 학급 대표로 스튜던트 카운실 활동을 하면서 ‘더 나은 학교’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스튜던트 카운실의 결정사항이나 진행되는 일에 대해 학급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공유하는 역할 및 아이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포함이고.
아이 학교의 스튜던트 카운실은 네 개의 분과로 돼 있었다. 학교의 전반적 상황 등을 학생들에게 알리고 홍보하는 분과, 각종 행사 등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분과, 자원봉사 및 결연을 맺은 빈민국 자매학교에 대한 기부 등의 행사를 담당하는 분과, 환경에 관한 활동을 하는 분과 등이었다. 3~5학년까지 전체 18명의 아이들이 스튜던트 카운실로 활동하며 각 분과 당 4~5명 정도가 활동한다고 했다. 아이는 2 지망으로 선택한, 교내 각종 행사 기획 및 진행 등을 담당하는 ‘스쿨 이벤트’ 분과에 배정됐고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
첫 번째로 기획한 행사는 각 학년 별 쉬는 시간을 좀 더 즐겁게 해 주기 위한 특별한 놀이 퍼포먼스 기획 및 진행이었다. 아이와 같은 분과에 속한 4명의 스튜던트 카운실 대표들은 각각 행사 진행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각 학년별 담당자를 배정해 그 시간엔 필요한 소품 준비부터 행사 진행, 그리고 마무리 청소까지 풀타임으로 봉사를 했다. 약 한 달 간의 준비를 하는 동안 아이는 수업을 빠지고 회의에 가야 하는 일이 잦았다. 행사 일정이 다가오면서는 더 바빠졌다. 나는 가끔 ‘아무리 그렇다고 수업을 뺄 정도인가’ 싶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는 행사가 순조롭게 끝난 후 엄청난 성취감과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
“한 달 만에 모든 걸 준비해야 해서 엄청 바빴는데 해내고 나니까 기분이 너무 좋았어. 사실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하다가 과연 잘 될 수 있을까, 걱정이 됐거든. 그런데 결국 해냈어.”
아이가 속한 스쿨 이벤트 분과는 현재 봉사를 담당하는 분과와 함께 ‘기부와 이벤트가 결합된’ 행사를 준비 중이다. 여전히 일주일에 두 번 회의를 가고, 이런저런 아이디어 등을 나누고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와중에 모든 분과가 한 자리에 모여 학교 발전 방안 등을 논의하는 회의도 진행되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 아이는 오늘 아침 나에게 호주 산불에 관한 발제를 하겠다고 했다. 얼마 전, 나와 매주 1회 진행하는 신문 읽고 토론하기 시간에 호주 산불에 관해 다룬 뒤로 아이는 동물들의 이야기에 마음 아파하며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싶어 했다.
나는 현재 한국의 초등학교 반장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반장단 회의가 활성화돼 있는지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내가 어렸을 때를 기준으로 생각해 별반 변화가 없을 수도 있겠고, 어쩌면 많은 변화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건, 한국에서 ‘반장’은 여전히 학급이나 학교를 위한 봉사에 포커싱 돼 있기보다는 어떤 권한을 가진 직책으로 여겨진다는 점 아닐지. 나 역시 아이가 처음 스튜던트 카운실 선거에서 당선됐을 때 어쩔 수 없이 우쭐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겪다 보니 아이가 지금 하고 있는 스튜던트 카운실 활동이야말로 학교와 친구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봉사하는, 우리가 말하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배우는 기회라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든다. 이 정도면 맨날 치고박고 싸우느라 제대로 하는 일이라곤 없는 국회보다 훨씬 나은 거 아닌가?
- 작가: 어나더씽킹 in Berlin/공중파 방송작가,종합매거진 피처 에디터, 경제매거진 기자, PR에이전시 콘텐츠 디렉터, 칼럼니스트, 자유기고가, 유럽통신원 활동 중, ‘운동화에 담긴 뉴발란스 이야기’ 저자
현재 베를린에 거주. 독일의 교육 방식을 접목해 초등생 남아를 키우며 아이의 행복한 미래에 대해 고민합니다.
- 본 글은 어나더씽킹 in Berlin 작가님께서 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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