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독일로,
나는 2006년부터 10년을 미국에서 살았다.
박사과정 밟느라 보스턴에서 5년, 남편을 만나 그의 학교가 있던 필라델피아에서 5년.
그리고 10년째 되던 해에 우리는 넷이 되어 독일로 이사를 왔다. 이제 독일 생활 3년째.
덕분에 나는 여행가방 싸기 3단, 이삿짐 싸기 1단의 고급 기술 보유자가 되었다.
호라티우스와 법정스님의 배틀
그간 내 삶은 유목민 같았다. 늘 이사를 염두에 두어야 했기 때문에 가구는 항상 eBay나 IKEA에서 몇 년 쓰다 버려도 좋을 만한 것을 골랐고, 변변한 그릇도 제대로 들이지 못했다. 이사의 적(敵)을 둘만 꼽자면 크고 무거운 가구와 잘 깨지는 그릇들이 아니던가. 큰 가구를 사지 않으려다 보니 수납 담당은 꾸준히 생겨나는 기저귀 박스. 차곡차곡 쌓아놓으면 궁상미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뿜어져 나와 눈이 부시다. 예쁜 그릇 앞에서는 늘 “이사 가면 사야지”의 주문을 외우며 돌아서다 보니, 손님이 와도 변변히 음식을 담아 인원 수대로 내 올 그릇이 없었다. (인간적으로 쟁반은 하나 사야 하나 고민 중이다.)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점을 찍어두느라 현재가 너무 녹슬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때론 좀 서글프기도 하다. 호라티우스(Horatius, 영미권에서는 Horace. 고대 로마의 시인이다.) 아저씨가 등 뒤에서 연분홍빛 카르페 디엠(Carpe Diem) 깃발을 흔들며 응원가를 부르고 있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섣불리 경계를 늦출 수는 없다. 공간이 있으면 짐은 어느새 늘어나 그 공간을 채우기 마련이고, 그 짐은 다(… 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내가 싸야 하니까. 남편 짐 말고는 모두 내가 갈무리해 담고 내 손으로 풀어 정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이다. 한 곳에 뿌리가 있어야 가지도 마음껏 펼쳐 보고 잎도 오종종하게 달아볼 텐데,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않으려다 보니 가지가 움츠러드는 셈이다.
택배 상자로 창조해 낸 아이들 플레이 키친. 이사할 때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치명적 매력을 가지고 있다. ⓒ a little teapot
떠다니는 삶의 서글픔
유목민의 삶이 조금 더 마음 아픈 것은 주로 내 의지 바깥의 영역이다.
가장 먼저는 내 오랜 둥지가 없어지던 느낌.
한국에 돌아갈 때마다 내 방과 내 물건들이 점차 어디론가 조금씩 분해되고 흩어져 버리는 느낌은 묘하게 서글펐다. 내가 모았던 무용하게 귀여웠던 것들은 집에 놀러 오는 조카들 손에 엄마가 하나 둘 쥐어주셨고, 음반이나 옷들도 서서히 줄어 갔다. 가장 아쉬운 것은 내가 사랑했던 책들. 23kg의 테두리 안에서 여행 가방을 싸려다 보면 공부에 관련되지 않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친구 같던 책들은 항상 김이며 말린 나물, 반찬에 밀려 고향 땅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인간이라면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원할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여행 가방을 싸면서 늘 배부른 돼지 쪽을 택했다. 꿀꿀.
미국 유학시절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고국의 명절이었다.
특히 중간고사 기간과 겹치기 마련이던 추석. 박사과정 1학기 때, 아직 적응도 제대로 못하고 정신없이 맞았던 추석이 가장 슬펐다. 집에는 그리운 사람들이 모두 모여 맛있는 것을 먹으며 웃고 있을 텐데, 나는 자유롭지도 못한 언어로 페이퍼를 몇 개나 써야 하다니.
둥지를 옮긴다는 건 이런 거구나. 23kg의 짐을 싸서 내 작고 따뜻한 둥지로부터만 나온 게 아니었다. 둥지가 있던 나무, 숲, 그곳의 공기, 냄새, 웃음소리. 즉 송편의 쫀득한 식감과 참기름 냄새와 지글거리는 소리, TV에서 방영했을 머털도사, 윷 던지는 소리, 그 모든 문화와 관습과 명절의 기운으로부터 통째로 휘리릭 빠져나온 것이었다.
기숙사 바로 옆에 흐르는 찰스 강이 참 예뻐 종종 산책을 하곤 했는데, 특히 페이퍼 쓰다가 막힐 때는 새벽에라도 강변을 찾곤 했다. 그 날 따라 캄캄한 밤 강물 위에 유독 커다랗게 둥실 떠 있던 달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저 달을 함께 볼 텐데, 달 주변의 공기는 너무 달랐다.
그 날 나는 서러운 마음에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 와인을 땄다.
독일로 건너오다
그래도 미국은 한국 음식을 구할 수 있었고 언어가 통하기는 했다. 내 가족이 생기면서 외로움도 차츰 옅어져 갔다. 그러나 독일에 오니 한국 식재료 구하기가 어려워진 것은 물론이요 우리는 산뜻하게 문맹이 되었다. 둘 다 고등학교 때 (심지어 나는 대학 때도) 독일어를 공부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머리에 남은 것은 der des dem den 뿐이었다. 허허허 망할.일요일엔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평일에도 8시면 문을 닫는 독일 남부. 처음에는 살 것이 많아서 토요일만 목 빼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평일에도 남편 퇴근 후 번개같이 장을 보아야 했는데, ‘문맹’과 ‘촉박한 시간’의 찬란한 콜라보는 우리 집에 예상치 못한 물건들을 들이기 시작했다. 남편은 야심차게 로션을 사 와 발랐지만 얼굴에선 보글보글 거품이 났고, 나는 어니언 링인 줄 알고 오징어 링을 집어와 의도치 않게 식구들에게 단백질을 제공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었던 남편은 2차 대전 때 커피를 구하기 어려워 마셨다는, 그래서 나이 드신 어른들이 향수로 가끔 찾는다는 이상한 곡물 가루를 사 왔고(몹시 구수하다), 나는 스킨인 줄 알고 1년 넘게 클렌징 워터를 얼굴에 꼼꼼하게 바르고 다녔다. (가뜩이나 썩어가는 피부에 잘하는 짓이다.) 남편도 옆에서 같이 발랐다.
집에 박사가 둘인데 이 지랄.
점차 독일어가 세 살 아동 수준으로 늘고(뿌듯) 생활도 안정이 되자 이번에는 문화와 풍습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옥토버 페스트뿐. (흠흠)
어른 둘만 있으면 큰 상관이 없는데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이런 망할, 독일에는 산타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오는 게 아니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산타는 훨씬 빨리 12월 6일, Nikolaustag에 온단다. 독일 아이들은 그 전날에 자기 구두나 부츠를 깨끗이 닦아 현관 앞에 두는데, 거기다 작은 선물을 넣고 간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좀 더 큰 선물을 받는데 주로 남부 쪽에는 Christkind(Christ Child, 아기 예수), 북부 쪽에는 Weihnachtsmann(Saint Nicholas or Santa Claus, 직역하면 크리스마스 맨)이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앗 뭐라고.
유치원 가려다 웅성웅성. 엄마, 니콜라우스 할아부지가 왔어요. (맨 오른쪽 사진 왼쪽 분) ⓒ a little teapot
다행히 새벽에 밖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다 내가 먼저 발견했고, 그 날이 니콜라우스탁인 것을 알고 있었고, 재빨리 검색해 본 덕분에 독일에는 산타가 일찍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한 번 더 와야 한다는 것도. 아니 왜 자꾸 오시고 참…) 실은 전날 크리스마스 쿠키를 왕창 구웠기에(멋도 모르고 타이밍 최고), 재빨리 사탕이며 초콜릿을 더해 작은 선물 봉지를 챙겨 이웃 아가들 부츠에 집어넣는 것까지 세이프.미친 선견지명, 나 어떻게 알고 구웠지 ⓒ a little teapot
산타클로스는 독일에서 성 니콜라우스(St. Nikolaus, 15 March 270 – 6 December 342)인데, 가난한 자들과 어린이들을 수호하는 성자로 알려져 있다. (왜 클로스 할아버지 말고 산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지 그것이 늘 궁금하다. 산타라고 부르는 건 성(聖)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 아닌가요.) 오늘날 산타가 밤에 선물이 든 자루를 메고 와서 몰래 선물을 놓고 가는 건 이 분의 일화에서 비롯한 것. 당시 풍습으로는 여성들이 결혼을 하지 못하면 다른 일거리가 없는 한 매춘부가 되어야 했는데(천오백 년도 넘은 다른 나라 얘기라 편견 없이 보고 싶어도, 와 나 이건 대체 무슨 풍습…), 동네에 한 때 부자였다가 재산을 잃고 가난해진 이에게 세 딸이 있었다. 지참금이 없어 모두 혼인을 하지 못할 상황. 이를 알게 된 니콜라우스가 이들을 돕고자 밤에 몰래 그 집 창문으로 금화가 든 자루를 던졌다고 한다. 딸이 셋이었으므로 사흘 밤을 각각 자루 하나씩을 던졌는데, 마지막 밤에 딸들의 아버지가 자지 않고 은인을 기다렸던 것. 무릎을 꿇고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아버지에게 니콜라우스는 자신의 선행을 절대 남들에게 알리지 말기를 청하였다는데, 뭐 이렇게 풍습으로까지 굳어진 것을 보면 🙂 호호.유치원 아이들이 만들어 장식한 성 니콜라우스(쏘 큣)와 동네 문구점에 등장한 성 니콜라우스(몹시 내 취향) ⓒ a little teapot
어쨌든, 이 문화권에서 자라지 않은 엄마 아빠가 이곳의 문화와 풍습에 주파수를 잘 맞춰두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이스터 버니도 오지 않고 산타님께서도 제 때에 방문하지 않는 것이다. 당장 유치원에 가니 (심지어 애들 유치원은 이름도 성 니콜라우스 어린이집이다.) 간밤에 성 니콜라우스가 주고 간 선물 이야기로 꼬마들이 복도에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지음이네 반 알레나는 손바닥만한 토끼 인형을 들고 와서 나한테까지 신나게 자랑했다. 문장에는 약하나 감탄사에 능한 나는(후후) 아는 감탄사를 모두 퍼부어 주었다.
휴.
얼굴색도 생김새도 조금 다른 데, 이런 이유까지 조금씩 쌓이면서 아이들 사이에 소외감과 거리감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싶어 살짝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시몬 베유, 뿌리내림이라는 것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면 그곳의 공기와 풍경에 익숙해지겠지만 이리저리 떠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다. 내가 이방인으로서 외로움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떠올리는 철학자는, 일찍 타계한 것이 안타까운 프랑스의 시몬 베유(Simone Weil, 1909-1943)다. 오빠는 잘 알려진 수학자라는데 수학 공식을 보면 제3외국어로 보이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고, 부모님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유학 시절 Conservative Political Theory라는 세미나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뿌리내림>이라고 번역된 베유의 <The Need for Roots (1949)>를 읽었는데, 20세기 인간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을 ‘uprootedness(‘뿌리 뽑힘’이라고 하면 적절할지 모르겠다)’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춰 진단하고 있었다. 베유에 따르면 단단하게 이어져 온 공동체가 와해되거나 붕괴된 상황에서 뿌리가 뽑히고 터전이 사라져 버린 사람들은 두 가지 행동양식을 보이게 된다. 하나는 죽은 사람처럼 체념하고 무기력해지는 것, 다른 하나는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행동 양식. 아마도 2차 대전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전자였을 것이고, 현재 이슬람 급진 세력은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사실 굉장히 큰 내용을 담고 있고 질문거리도 많은 책이었지만, 그 책에는 그냥 개인적으로 마음에 쏙 드는 문장이 있었다. 외로운 유학생 시절 내 마음을 유독 파고들었던 문장은 내가 어딘가에 따스하고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다는 느낌, 그런 충만감과 소속감이 ‘인간 삶의 필수조건’이라는 것. 회색 활자 속에서 반짝-하고 빛나며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은 문장이었다. 밥이나 물, 공기 말고도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것은 나의 둥지가 어딘가에 있고 내가 따뜻하게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쌀과 우유와 달걀만이 생필품이 아니라 내 둥지의 온기, 엄마와의 전화 통화, 친구와 나누는 문자 하나, 이런 것 역시 생필품인 것.가장 그리운 것은
외국 생활이 길어지면서 내 마음은 그에 맞춰 새롭게 반죽되었고(반죽에는 수분이 필요한 법. 하여 눈물과 술이 상당량 포함되었다.), 그럭저럭 예쁘게 굳어서 지금은 웬만해서는 고국의 명절에 외로움을 느끼는 법이 없다. 기술의 진보가 인류의 다정함을 위해 애써주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서로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아쉬운 것은 편의점 앞에서 과자 한 봉지에 맥주캔을 두셋쯤 늘어놓고 소소한 얘기를 나누며 낄낄거릴 수 있는 동네 친구다. 2D 말고 3D로, 등짝을 때려가며 친구를 만나고 싶은 것. 친구의 좋은 일과 슬픈 일에 재깍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음이 가장 아쉽고, 나의 소중한 이들과 일상을 나눌 수 없음이 가장 슬프다.오랜만에 고국에 돌아가 친구들을 만나면 그 만남들은 일상이 아니라 특별한 행사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 만남들이 즐겁지 않다는 건 아니다. 내가 마음 깊이 기다려왔던 행사들이다. 보고 싶었던 얼굴들을 만날 때, 나는 오랜만에 허락된 사탕을 양손 가득 쥔 아이처럼 즐겁고 행복하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일과를 마치는 저녁 즈음 문득 생각나서 만날 수 있는 오랜 친구.
“나 오늘 너네 집에 가도 돼?”
따뜻한 방바닥에 뒹굴면서, 서로 내가 네 배 위에 다리를 한 짝 올리겠다고 투닥대면서, 둘이 그저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며 느끼는 그 게으른 유대감이 나는 그립다.
외국 생활을 하면서 좋은 사람들, 따뜻한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늘 한국 사람들이 그리웠고 내 오랜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외국에서 만난 친구들은 내가 유목민 같은 삶을 살았기에 헤어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했다.
가끔 글로벌하게 날아든 뻐꾸기에도 내 연애감정은 몹시 고루하게 민족적이었다.
한 번은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던 외국인 친구에게 정중하게 입장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많은 것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늦은 밤 비슷한 야식 메뉴에 함께 침이 고이는 사람, 단어 하나만으로도 바로 공감이 되는 그런 사람과 함께이고 싶다고 말했다. 연애나 결혼에서만큼은 좀 더 편안하고 싶다고. (타이완 사람과 소개팅(내 첫 소개팅이자 마지막 소개팅이었다! 인생을 이 따위로 살다니.)을 한 적이 있었는데, 같은 문화권에다가 굉장히 친절하고 심지어 비주얼마저 훌륭하셨지만 대화가 영어 듣기 평가 같은 느낌이어서 만남 자체가 편하지 않았다.)
내 대답에 호탕하게 껄껄 웃던 그 친구는 약간 상처 받은 표정으로 내뱉었다.
“한국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거네.”
어디 가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건 Racism이라고, 너 큰일 날 소리 하는 거라고.
아, 그런 건가.
그래도 그때는 Racism이고 나발이고, 그러고 싶었다.
함께 일상을 나눌 친구가 없다면 비슷한 일상을 만들어 갈 가족이라도 꿈꾸고 싶었다.
(지금은.. 이라고 묻는다면 미소로 대답하겠다. 흐흐흐.)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기
하지만 외국 생활을 딱히 후회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다른 나라, 다른 문화에서 한 번쯤 살아보는 경험을 적극 추천한다. 여행 말고 잠시 솜털 같은 뿌리라도 내릴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이왕이면 젊은 시절에 갖기를.
내 집에서 오래 살다 보면 내 집 안의 먼지나 우리 가정의 불합리한 모습이 잘 눈에 띄지 않는 법이다. 익숙함 탓이다.
어디에나 장단점은 있다. 한국의 장점을 꼽으라고 하면 이백삼십육 개쯤 꼽을 수 있고, 단점 역시 비슷하게 꼽을 수 있다. 미국도, 독일도 마찬가지다. 내가 독일에 와서 살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자랑하지 않는 소박한 문화였다. (물론 독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이 부분만큼은 정말 좋아한다.) 이 곳 사람들은 돈 자랑을 굉장히 못난 짓, 천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소탈해 보이는 동네 아저씨가 알고 보면 집이 몇십 채씩 있는 부자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씩씩하게 자전거를 타고 아이와 함께 유치원에 오는 검소해 보이는 같은 반 친구 엄마가 알고 보면 의사고 그렇다. 미국만 해도 과시하는 문화였고 빈부의 격차는 컸다. 독일에서는 꼭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은 값이 정말 싸다. 월급 격차가 기본적으로 크지 않은 사회이기도 하지만, 저렴한 생활비로도 충분히 살 수 있게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격차는 눈에 심하게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은 대체로 넉넉하고 행복해 보인다. 달걀을 사면서, 밀가루를 사면서, 꽃을 사면서(꽃 값이 무척 싸다는 부분도 독일의 사랑스러운 점이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함부로 비교하고 과시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는 건 그만큼 생의 에너지가 엄청나게 절약되는 느낌이다. 그 안에서 잘 모르고 커 왔지만 밖에서 보면 그렇다. 비교하고, 자랑하고, 1등이 되어야 하고, 모두들 한 곳만을 바라보는 사회는 피로하다.
외국에서 나는 자유와 속박을 동시에 치열하게 느끼며 살고 있다.
그동안 여러 번 껍질을 깨고 나오면서 겉은 단단해지고 속은 더 말랑말랑해졌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나는 외국 생활을 통해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입을 가리지 않고 웃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미국 교수님들은 내가 이야기할 때 왜 내 손이 입에 붙어있는지 항상 궁금해하셨다. 나는 내가 그렇게 얘기하는 줄 전혀 몰랐다. 나도 모르게 소위 여자다운 것으로 몸에 배어 희한하게 굳어져버린 습관이 깨어져 나간 것만으로도 나는 크게 만족한다.
내가 동부에서만 지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미국은 정말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오히려 인종차별에 굉장히 민감했다. 내 고루한 민족주의적 생각을 여지없이 깨 주는 친구들도 많았고, 위 친구처럼 어디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알려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곳은 아시아인이 더 드문 데다가, 그런 민감성도 좀 더 떨어지는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이 이름만 들어도 광분하며 애정을 표현하는 D형아가 있다. D가 독일 초등학교에서 1년을 잘 지낸 것이 너무 대견하고 예쁘다는 내 말에, D의 엄마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약간 걱정이 생겼다고 했다. 처음 보는 애들을 만날 때 “엄마, 쟤들이 나 중국 애라고 놀리면 어떻게 해?”라고 아이가 물으면 좀 마음이 무겁다고. (난데없이 1패를 받은 중국에도 미안하다.)
우리 아이들은 이 곳에서 자신의 뿌리를 어떻게 아파하며 내릴 것인가. 다른 공간에 뚝 떨어져 엄마도 힘든데, 엄마가 옆에서 잘 도와줄 수 있을까.
지금은 오히려 어려서 쓸 말이 별로 없지만, 커가면서 쓸 말이 더 늘어날 주제인 것 같다.
3년 뒤쯤, 그리고 5년 뒤쯤 이 글을 다시 보면 무슨 생각이 들 지 궁금하다.
일단 솜털 같은 뿌리라도 열심히 내려 보자.
잡초를 뽑아보면 알겠지만 미세하고 가느다란 잔뿌리 하나의 힘이 얼마나 센 지.
일단은 그 힘을 믿어보기로 한다.
-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 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 응원의 메세지나 문의를 아래 댓글창에 남겨주세요. 댓글을 남겨주시면 작가님께 메세지가 직접 전달이 됩니다.
ⓒ 구텐탁코리아(//www.gyrocarpu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