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이제 손 씻고 알림장 가져와 봐.”
큰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내가 가장 먼저 하는 말이다. 하우스아우프가벤 헤프트 (Hausaufgaben Heft)라 불리는 알림장은 평상시는 물론이고, 책은 하나도 가져가지 않는 현장학습을 갈 때도 꼭 챙겨가야 하는 독일 초등학생 필수품이다. 담임 선생님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심지어 카톡까지 다 공개하는 한국과 달리, 이곳 초등학교에서는 선생님의 개인 연락처를 따로 알려주지 않는다. 아파서 결석을 해야 할 때는 담임 선생님이 아니라 학교 비서실로 연락해야 하고, 아이가 숙제나 준비물을 잘 못 챙겼을 경우에는 다른 학부모에게 물어봐야 한다. 선생님을 직접 뵙고 면담을 하고 싶으면 대개 알림장에 메모를 남기는 걸로 신청을 시작한다.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학부모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개별적으로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알림장에 메모를 남긴다. 그래서 알림장에는 숙제나 준비물만 적혀있는 게 아니라 부모와 선생님 사이에 오고 가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가끔은 반갑지 않은 메모가 적혀 있기도 한다.
“조슈아가 수업 시간에 친구하고 많이 떠들었습니다.”
부모인 나는 그 쪽지 아래에다가 싸인과 함께 답글을 써서 보낸다.
“죄송합니다. 조슈아가 앞으론 수업시간에 떠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한 번은 친한 친구와 말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조슈아랑 칼이 다퉜습니다. 서로 밀치기도 하면서 싸웠지만 서로 화해했어요. 오늘 일을 통해 친구들과 갈등 생겼을 때 어떻게 잘 해결하는지 배웠을 거라 믿어요.”
그 날, 알림장 속 쪽지 덕분에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 내내 왜 아이의 표정이 어두웠는지 알 수 있었다. 칼이랑 싸웠냐고 조심스레 물어봤다. 많이 속상했는지 학교에서의 일을 두서없이 마구마구 뱉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조건 칼이 나빴고, 걔가 먼저 잘못했는데 괜히 자기까지 혼났다며 씩씩 거렸다. 흥분하며 말하는 아이를 꼭 안고 맞장구 춰 주며 들어주니 나중에는 아이도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많이 누그러 졌나 보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화해했으니까 다시 자기 친구라며, 내일 학교 가면 칼에게 준다고 초콜릿 하나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독일에선 알림장이야 말로 선생님과 학부모 그리고 아이 사이의 대화를 잇는 중요한 메신저이다. 2학년이 된 지금은 아이가 알림장을 제대로 써오니 의사소통이 제법 원활하지만, 글씨를 모르는 1학년 초반에는 알림장 읽는 게 무슨 비밀 암호 해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독일 아이들은 문자 교육을 받지 않은 천둥벌거숭이 문맹 상태로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만 6-7세 대부분의 아이들은 알파벳을 대충 익히고, 자기 이름이랑 마마(엄마: Mama), 파파(아빠:Papa) 같이 간단한 단어 몇 개만 쓸 줄 아는 수준이다. 한국처럼 입학 전에 책을 술술 읽어나 받아 쓰기를 할 수 있는 아이는 거의 없다. 독일 유치원에서 영특하다고 칭찬받던 큰 아이도 그냥 일반적인 수준에 동생 이름 노아 (Noah), 그리고 자기가 젤 좋아하는 장난감 레고 (Lego)를 더 읽고 쓸 수 있는 정도였다. 이렇게 까막눈 아이들을 데리고 알림장을 쓰려니 어린 학생들과 선생님도 고되고, 그 알림장을 읽어야 하는 학부모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일단 요일을 읽을 줄 모르니, 알림장의 요일 칸은 색깔로 대체해야 했다. 빨간색은 노란색, 화요일은 초록색,,, 이런 식으로 말이다. 과목과 교과서는 글쓰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암호처럼 줄임말을 만들었다. Ma-AH(Mathematik Arbeitheft)는 수학 익힘책, D-L 독일어 읽기 책 etc…
아무리 간단한 내용이라도 삐뚤 빼 둘한 손글씨로 암호문처럼 써온 알림장을 해독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명탐정 부럽지 않은 추리력, 글씨인지 그림인지 잘 살펴보고 구분해내는 관찰력과 집중력,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인내력, 이 모든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게 바로 독일 초등학생 알림장 읽기이다. 가진 능력을 총동원해도 알림장에 적힌 내용을 해독해내지 못하면 동료 학부모에게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1학년 초에는 학부모 단체 메시지 창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우리애가 써온 알림장을 알아볼 수가 없어요. 도대체 오늘 숙제가 뭐예요?’
‘왜 어제랑 오늘이랑 알림장에 똑같은 걸 써 온 거죠? 설마 똑같은 숙제를 두 번 내 준건 아니죠?’
‘수학책 7페이지에 있는 1,2,3번 문제가 숙제라는데… 수학책 7페이지에는 1,2,3번 문제가 아예 없는데요? 혹시 수학 익힘책인가요? 아님 오늘 숙제가 수학이 아니라 독일어인가요?’
선생님이 똑같은 내용을 알림장에 적으라 하셨을 텐데 아이들은 어쩜 이렇게 다양한 버전으로 알림장을 써오는 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대부분의 알림장 수수께끼는 몇 번의 문자를 주고받으면 풀린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전설 같은 알림장 미스터리가 하니 있으니, 그건 바로 해독 난이도가 가장 높다는 그림으로 그린 준비물 목록이었다.
독일 초등학교 앞에는 온갖 학용품과 수업시간에 필요한 모든 준비물을 구비해 놓고 파는 문방구가 없다. 연필 한 자루, 지우개 하나를 사려도 해도 시내에 있는 큰 잡화점 같은 곳에 가야 한다. 그래서 준비물이 있으면 주말을 껴서 일주일 혹은 최소 3-4일 전에는 알려준다. 한 번은 다음 주에 가져오라고 몇 가지 준비물을 알려주셨는데, 아이들이 글씨를 못 쓰니 그림으로 그려 넣으라고 하셨나 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뭘 하려는 건지, 뭐를 가져오라는 건지 모르겠고, 애한테 물어봐도 대답은 ‘몰라’ 일 뿐이었다.
- 작가: 오롱
<동독에서 일주일을> 공동저자. 한국에 나고 자람. 스위스, 미국, 독일을 거쳐 이제 막 영국에 정착. 언어, 문화, 정체성이 뒤섞인 콩가루 집안을 지키는 씩씩한 엄마.
- 본 글은 오롱 작가님께서 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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