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와 공포의 시간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어제 이 곳에도 5주간 모든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닫기로 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남쪽으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보내는 일이 많은 독일의 특성상, 점차 확진자의 상승세가 가파른 곡선을 그리고 있던 차다.
“지음아 이음아, 이제 한 달 동안 유치원 문 닫는대.”
“왜? 선생님이 아파?”
선생님이 아파서 한 번 취소되었던 Turnen 수업 이후로, 뭔가 그런 공식이 머릿속에 생긴 모양이었다. (Turnen은 ‘체조’로 번역되지만 실은 각종 놀이를 하며 미친 듯이 친구들과 뛰어노는 시간. 끝나면 애들이 다 얼굴이 벌건 채 새벽 두 시에 감자탕 집에서 갓 나온 어른들의 행색을 하고 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지구가 아파.”
지구는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아픈 게 아니라니 아이는 일단 안심인 모양이었다. 지구가 뭔지는 몰라도 바이러스가 위험하다는 것은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해리포터를 헬리콥터로 알아듣는 아이에게 바이러스가 뭔지 알려주는 일이라니. 나의 야망은 곧 그 놈들 손 안의 계란 껍데기처럼 와자작 부서지고 말았다.
그래, 그냥 놀아라.
근대 과학의 파괴적인 힘
과학은 양날의 검처럼 우리 삶에 칼날을 휘두른다. 어두침침하고 더러운 부분을 잘라내 주기도 하지만, 평온한 일상에 느닷없이 비수를 꽂기도 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몇 시간 안에 돌 수 있게 됐지만, 그로부터 배출되는 엄청난 온실가스로 인해 우리는 미쳐 날뛰는 여름을 맞게 되었고, 바이러스 역시 편안하게 비행기를 타고 기내식을 먹으며 세계 곳곳을 여행하게 되었다. 중세 유럽 인구 최소 삼분의 일을 사라지게 했다는 페스트가 산 넘고 물 건너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시도하던 고려까지 오기란 상당히 힘들었지만, 중국 우한 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럽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어느 때보다 서로 이어진 삶을 살고 있다. 손 안의 휴대폰으로 세상 구석구석과 닿을 수 있으며, 들숨 날숨을 전 세계인과 공유하며 살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많은 철학자들은 총명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근대 유럽에서 철학과 과학의 사이는 그리 정답지 못했다. 근대 과학이 인간 삶의 모습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이후로, 많은 철학자들이 과학의 파괴적인 특성을 근심스럽게 바라보았던 것이다. 특히 엄청난 천재일 것이 틀림없는 막스 베버는, 뭐든지 새롭게 바꾸려는 과학의 본성에서 근대의 딜레마가 기인한다고 통찰했다.과학은 본질적으로 혁신을 추구하기 때문에 낡은 것이 아름다울 틈을 주지 않는다.
낡은 것은 비합리적인 것, 비과학적인 것으로 교체의 대상이다. 베버에 따르면 근대 과학은 우리가 삶의 곳곳에 소중하게 박아 둔 가치들이나, 어떤 신비롭고 신성한 믿음 같은 것들을 빠른 속도로 산산이 부수어 결국에는 우리 삶에 어떤 가치도 남지 않은 허무한 결말을 남긴다. 과학 자신조차 늘 스스로를 새롭게 갈아치워야 하니, 그 ‘갈아치우기 무한 사슬’ 속에 놓인 유한한 인간 존재는 허무해질 수 있는 탓이다. 학부시절 내 전공은 Political Science and Diplomacy(어머 내가 저런 걸 배웠다니)였고, 석사 때 과 이름은 Political Science, 박사 때는 그냥 Politics였다. 점점 줄어드는 내 과의 명칭은 베버의 고뇌를 닮았다. 팩트와 진리와 객관적 지식을 논하는 과학(science)과, 판단과 설득과 의견과 주관적 가치의 영역인 정치학(politics)이 과연 서로 조화롭게 어깨동무를 하고 과 이름(political science)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베버는 나의 앞날을 미리부터 그렇게 걱정해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낡은 것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과학의 속도감은 대체로 낡은 것이 숙성되어 아름다울 시간을 주지 않는다. 판단과 성찰을 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고, 마치 술값 안 내려는 친구처럼 저만치 앞서 나가기 때문이다.
생화학과 교수이자 수많은 SF 소설을 쓴 인기 작가였던 아이작 아시모프는, 현재 인간 삶의 최대 비극은 우리 사회가 지혜를 모아서 쌓아 올리는 속도보다 과학이 지식을 긁어모으는 속도가 훨씬 빠른 점이라고 했다. “The saddest aspect of life right now is that science gathers knowledge faster than society gathers wisdom.”
지혜와 정의의 속도
아시모프의 말대로, 정보와 기술은 사회가 지혜와 통찰을 쌓아 올리는 속도보다 늘 빠르게 내달린다. 바이러스가 돌기 시작하자, 우리는 다른 생각을 멈추고 나의 생존 기술과 마스크 정보에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생존과 안전을 위협하는 공포 앞에서는 모든 사상과 철학이 무기력해 보인다.일단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남이 미워 보인다.
잘 알려진 매독이라는 성병이 있다. 감염되어 생기는 피부 궤양이 매화꽃 같은 모양이라 매독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 사람들은 이 몹쓸 병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고 싶어 했다. 그래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라들은 서로에게 똥을 던졌다.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 병,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병, 그리스에서는 불가리아 병, 불가리아에서는 그리스 병.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병,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병, 폴란드에서는 독일병으로 불렀다. (병으로 유럽 배낭여행 일정 짤 기세.) 사랑이 넘치는 지구, 이 병은 페스트와는 다르게 조선에까지 흘러들었으니 조선에서는 이를 당창(唐瘡)이라는 이름의 중국 병으로 불렀고, 심지어 터키에서는 기독교 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글로벌한 똥 던지기 시합에서 돋보이는 존재감은 단연 프랑스.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영국, 무려 삼국에서 입을 모아 프랑스 병으로 불렀다니 여기저기에서 많이 밉보였나 보다.
저 이야기를 읽을 땐 그저 웃겼는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우한 폐렴이라고 부르겠다고 난리, 대구 신천지 사태로 부르겠다며 또 난리를 피우던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여 이제는 어쩐지 씁쓸하다. 우한이나 대구 신천지가 책임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못된 병의 책임을 전적으로 다른 곳에 두고 손가락질하는 일은 그리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우한과 대구 쪽에 선을 그었지만, 외국에서는 그 선을 더 넓게 아시아 전체에 그려버리기 때문이다. 뉴욕의 지하철에서, 런던의 길거리에서, 이탈리아의 주점에서, 아시아계 사람들이 험한 일을 당했다. 선을 긋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대체로 나 아니면 남이다. 비난하는 마음, 혐오하는 마음은 이렇게 손쉽게 나에게 되돌아온다. 지혜의 속도가, 빠른 정보를 통해 확산되는 미움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탓이다.
생존과 안전을 위협하는 공포 앞에서는 모든 사상과 철학이 무기력해 보이지만, 나는 그렇기에 오히려 이런 상황에 철학이 더욱 힘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지금 우리는 파급력은 크되 파괴력은 크지 않은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
이 사태가 빨리 극복되려면 공포와 미움의 속도보다 지혜와 정의의 속도를 높여야 하지 않을까.
공포의 긍정적인 힘
많은 철학자들에게 공포는 파괴적이고 야만적인 것이다. 공포란 인간 이성의 적일 뿐 아니라 자유의 적, 문명의 적이다. 공포 정치에 특히 반감이 컸던 몽테스키외나 디드로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 뿐 아니라 헤겔, 아렌트, 쉬클라 같은 많은 철학자들이 공포에 관해서 비슷한 결의 견해를 공유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정치철학을 들여다보면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만 싶은 공포에도 순기능이 있다. 그중 이런 상황에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던 ‘공포의 도덕적 기능’과 버크 및 토크빌이 말하던 ‘공포의 경외적 기능'(a.k.a. 귀싸대기 기능)이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공포는, 놀랍게도 도덕과 매우 밀접한 개념이었다. 도덕의 절친이 공포라는 말이다.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착한 우리 애가 친구를 잘못 사귄 거 아닌가 싶지만, 공포가 무조건 세상 몹쓸 것이 된 건 사실 꽤 최근의 일이다. (거기에 또 큰 역할을 하신 것이 바로 버튼 하나로 대량 살상을 가능케 한 과학 기술이시다.)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와는 꽤 다른 관점에서 공포를 바라보았다. 그는 도덕적으로 성숙된 사람은 공포를 잘 컨트롤할 수 있으며, 공포에는 올바른 공포와 그렇지 않은 공포가 있다고 생각했다. 공포에 예쁜 놈과 미운 놈이 있다니 이게 무슨 호랑이 풀 뜯어먹는 소린가 싶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둘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자랑스러운 시민으로서 명예가 실추되는 것에 대한 공포심은 올바른 종류의 공포지만, 구두쇠가 내 재산을 잃을까 벌벌 떠는 두려움은 올바른 공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녀 사냥에 열을 올리기보다는 지금 당장 가장 위험에 노출된 어려운 사람들부터 생각했으면 좋겠다. 웅크리고 앉아 이 광풍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 불어올 ‘보복적 소비’를 예측하기보다는 그동안 우리의 소비 행태가 어떠했는지를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여름쯤 상황이 진정되면 그동안의 소비 욕망이 일거에 터져 나오는 ‘보복적 소비’가 예상된다는 전망을 보았다. 침체된 경기가 살아나는 거야 기쁘고 행복한 일이지만, 나는 그 보복적 소비라는 말이 좀 불편했다. 사람들은 왜 부자 되라고 덕담을 하고, 공격적 마케팅을 하며, 보복적 소비를 예측하는 걸까. 사랑스러운 한 연예인이 귀엽게 “부자 되세요!”를 외치던 광고가 큰 호응을 얻던 고조선 (흠흠) 무렵, 석사 시절 나의 지도교수님은 이런 자본주의적 욕망을 덕담처럼 퍼뜨리는 광고가 튀어나와 사람들에게 아무 위화감 없이 먹힌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 자본주의의 충실한 노예로, 전날 마신 술이 덜 깼던 당시의 나는 선생님 말씀이 이해는 가면서도 크게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 부자 되라는 게 어때서. 나도 되고 싶은데요.
“행복은 늘 단순한 데 있다. 가을날 창호지를 바르면서 아무 방해받지 않고 창에 오후에 햇살이 비쳐들 때 얼마나 아늑하고 좋은가.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 행복의 조건을 도배사에게 맡겨 버리면 스스로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한다.”
법정스님의 글을 읽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하는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본다. 조그만 아이의 손을 잡고 동네 수퍼마켓에 가서 판매대의 봄꽃 향기를 맡아보는 일, 한국 라면을 발견하고 즐거워하는 일, 일부러 깃털이 붙은 달걀을 골라 담는 일, 계산을 하면서 아이에게 작은 사탕을 내미시는 주인아저씨께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일, 사탕을 손에 쥔 아이의 기쁨 가득한 눈을 보는 일.
배송 서비스에 맡겨 버리면 놓치는 행복이다. 장바구니를 메고 집을 나서야 얻을 수 있는 행복이다.
집 밖으로 나가기 귀찮아 편리함만 추구하다가 결국 우리 스스로 집에 갇혀있는 건 아닌지, 배송 서비스를 즐기다 결국 배송 서비스에만 의존하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우리가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소비할 때 죄책감을 느낀다는 독일 사람들 틈에 살아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죄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어떤 소비를 하고 있는지는 틈틈이 돌아봐야 한다고 본다. 미국에서 10년 살다 건너갔던 독일에서, 독일이 다르다고 느꼈던 가장 첫 순간은 공항 화장실 휴지가 거칠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엉덩이로 처음 독일을 느낄 때는 그 의미가 좀 모호했는데, 그 의미가 명확해진 건 곧바로 들렀던 마트에서였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엄청난 컬처 쇼크가 있었으니 바로 소비자에게 미친 듯이 안겨 주는 비닐봉지였다. 정말 달걀 따로, 고기 따로, 채소 따로, 과자 따로, 아이템 별로 각각 비닐봉지에 (그것도 두 겹씩) 담아주는 미국 수퍼마켓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독일은 대체로 소박하고, 장바구니가 없으면 장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환경을 생각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물건들이 대체로 앙증맞게 소규모로 판매된다는 점도 달랐다. 싸게 많이 줄 테니 돈 쓰라고 권하는 묶음 상품이나 1+1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많이 사라 팍팍 써라’의 나라에서 갓 건너온 나에게 ‘너 그거 진짜 필요해?’ 마트가 이렇게 묻는 듯한 느낌이었다.
달걀이 상온에 놓여 판매된다는 점도 신기했다. 동네 수퍼에는 내가 바로 노오오오른자다아아아아! 하고 소리치는 듯 오렌지빛에 가깝게 샛노란 노른자가 든 달걀이 근처 농가에서 오는데, 그걸 필요한 만큼 골라 담아 사곤 한다. 사람들은 달걀판을 버리지 않고 장 볼 때 다시 들고 가서 새 달걀을 담아오거나, 내가 한 번 쓴 달걀판을 그 주변에 놓아두고 오곤 했다. 달걀은 더즌도 아니고 한 판도 아니고, 여섯 개 아니면 열 개가 기본이었다.
좀 촌스러울 정도로 환경 문제에 열심인 독일 사람들, 적게 소비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 사람들이 나는 고맙고 사랑스럽다.
(그다음으로 신기했던 점은 인간이 감자로 이렇게 많은 음식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거였는데, 현재 독일 마트는 텅텅 비어서 감자를 찾아볼 수가 없다. 독일 마트에 감자가 없다니.)
독일에서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지 못하고 맞는 시간들이 나를 이런저런 생각의 소용돌이에 던져 넣어 이리 긴 글을 생산케 하고 말았다.
우리가 모두 이어져 있다는 것은 재앙이자 축복이다.
집구석에서 내면으로 침잠할 시간, 고독과 성찰의 시간.
여유 없이 내달려 온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지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
서투르지만 공포가 우리에게 주는 시간과 기회에 대해 쓰고 싶었다.
아이들과 한 달 넘게 집구석에서 뒹굴려면 미쳐 돌아갈 것 같지만,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미쳐 돌아갔는지 일단 생각해 봐야겠다 싶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지 스스로 돌아보고 싶었다.
어제, 작은아이가 작고 가벼운 손을 내 뺨에 얹고 잠이 들었다.
나는 팔을 두르면 쏙 들어오는 조그만 몸을 꼭 안고 잠을 청했다.
밖은 검지만 내 안에는 무지개가 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이 세상은 충만했다.
밖에는 차디찬 바이러스가 입김을 호 불며 돌아다니고 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위안을 주며 종이접기 하듯 꼼지락꼼지락 까만 밤을 함께 접었다.
아직 너를 꼭 안을 수 있는 이 시간. 고맙고도 무서운 시간이다.
-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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