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개방했는데 마음의 문이 열렸다
독일 사람들이 집에서 밥을 먹는 이유
특별한 날, 외식 대신 집으로 ‘초대’
철판 위 지글지글 구워지는 삼겹살, 오붓한 분위기 속 식탁 위 차려진 세계 각지의 전통 음식, 윤기 흐르는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치킨.., 이 모든 것을 재쳐두고 나는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끓이고 당면을 불려 잡채를 만들 거야.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음료수와 과일을 부탁하고 나는 이른 아침 장을 보러 가겠지.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독일인 친구들을 위해 아시아 마트를 들러 특별한 재료들을 사고, 집으로 돌아와 쌀을 씻어 물에 담가 둘 거야. 친구들이 도착하면 우린 함께 요리를 하고 완성이 되면 자연스레 둘러앉아 음식을 먹겠지. 후식은 직접 내린 커피와 차가 좋을 거야. 케이크와 쿠키는 당연히 빠질 수 없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소파 위에 앉은 우리는 까르르 웃으며 담소를 나눠. 블루투스 스피커로 잔잔히 흘러나오는 노래는 분위기를 더욱 무르익게 할 것이고 이야기 주제는 끝없이 흘러넘쳐.특별한 날이 아닌 오늘은, 뭘 해 먹을까?
생일, 졸업, 송별회 등의 특별한 날엔 조금 거한 상을 차리지만 보통의 날에도 우리는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어. 햄버거가 먹고 싶은 날엔 다진 고기를 사 와 버터와 함께 구운 뒤 빵 속에 야채와 함께 수제버거를 만들어 먹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오늘 같은 날엔 커다란 냄비에 면을 한가득 삶고 그릇 위에 소스를 뿌려 대충 비벼먹기도 해. 독일인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을 매우 즐기지만 음식은 대체로 집에서 만들어 함께 먹는 것을 선호해. 처음 친구네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땐 과분한 기분이 들어 선물과 먹거리를 잔뜩 들고 가 고마움을 표현했지만, 이제는 초대를 받을 때면 부담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가게 돼. 아마도 다음 만남은 우리 집이 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거야. 그렇게 어느 순간 우리 집은 열려있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더라.집을 개방했는데 마음의 문이 열렸다
(외모든, 집이든) 언제나 깔끔히 정돈된 모습만 보여주고 싶던 내가 이제는 자연스러운 나를 보여주는 것을 꺼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 장을 보지 않아 냉장고가 텅 비어있는 날 누군가 와도 최소한의 것으로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웃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보일 줄 아는 독일인을 통해 편견 없이 바라보는 눈이 생겼기 때문이야. 타인을 위해 집을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내 것을 정돈하고, 과시하기 위해 무언가 사 들이기보단 길가에서 산 이름 모를 화가의 작품을 자신의 침실에 걸어 두는 소박한 취미를 가진 독일인을 통해 사적인 영역을 개방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고 괜찮은 일임을 깨닫게 됐어. ‘어떻게 보일까’는 더 이상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요리를 잘하고 못하고도 중요하지 않아. 열린 주방에서 우리는 ‘함께’ 만들 거니까.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중요한 거야.그렇다고 꼭 집에서만 먹어야 하는 건 아니고
외식도 해. 햇살 좋은 날 야외 카페에 앉아 브런치를 즐기는 노인들도 많고, 핫한 한국음식점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즐기는 젊은 독일인들도 봤어. 점심시간마다 밖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직장인들은 하루 한번 외식이 필수인걸. 뿐만 아니라 채식주의자를 위한 다양한 종류의 레스토랑이 많아 나 또한 한동안 여기저기 다녀도 봤어. 하지만 거의 모든 약속 때마다 외식을 하는 한국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독일 사람들이 집에서 먹는 비율이 현저히 높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또한 한국처럼 ‘힙합’ 분위기의 음식점이 적은 이곳 독일에서는 집에서의 식사가 더 좋은 분위기를 가져올 때가 많고, 가격도 훨씬 저렴해. 합리적으로 따져보는 것을 좋아하는 독일인에게 ‘매 순간 외식’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거야.이제야 집이 집처럼 느껴진다
집에서 밥을 차려먹는 것보다 밖에서 김밥 한 줄 사 먹는 게 더 싸게 치던 한국에선 집에서 밥 냄새를 맡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어. 부모님 집을 가지 않는 이상 내 주식은 언제나 외식이었고, 부엌은 텅텅 비어 있었어. 하지만 이곳 독일에서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 저녁 메뉴를 생각하며 장을 보러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커피콩은 떨어지기 전에 반드시 사둬. 아침에 눈을 뜨면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시며 밥을 담가 둔 채 해야 할 일을 해. 주로 카페에서 과제를 하던 한국에서 집이란 공간은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 하지만 이제 나는 집이 가장 편해. 집에서 먹는 밥이 가장 맛있고, 집에서 내려먹는 커피가, 차가 가장 좋아.인간은 ‘적응의 동물’
하지만 한국을 생각하면 그리운 것도 많아. 말도 안 되는 경치 앞에서 먹던 티라미수와 어디서는 마실 수 있던 아메리카노. 세계 곳곳의 맛집을 모아둔 것 같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가게들은 세계 어느 곳을 가도 비교할 수 없을 거야. 가끔은 지나치게 소비를 조장하는 문화로 변질된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들지만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것이 많고 유흥거리가 많다는 점에서는 자랑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해. 어느 나라나 발전해 온 배경과, 살아온 환경에 따라 변모하는 것이 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외식 문화 그리고 독일의 외식문화는 다를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 무엇을, 어디에서 먹든 사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곳이 천국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만날 날이 정말 기대돼. 그것은 분명 최고의 식사가 될테니..- 작가: 물결 / 예술가
독일에서의 삶을 기록하는 예술심리치료사. 재미있게 사는 것이 좋은 사람. - 본 글은 물결 작가님께서 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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